‘슬리만 카데르(Slimane Kader)’의 ‘오션킹(Avec vue sous la mer)’은 현대 유람선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린 유쾌한 소설이다.

표지

이 소설은 볼 때 시대 배경이 언제인건지 꽤 헷갈렸는데, 만약 현대의 소설이나 영화 등을 종종 언급하지 않았다면 18~19세기라고 해도 믿었을 것 같다. 부려지는 선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게 마치 노예를 연상케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좁은 4인실에 간신리 몸만 누인다는 것도 그렇고, 일하는 것에 따라 각자에 대한 시선이나 처우가 달라진다는 것도 마치 카스트제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에 더 그 엄격한 계급 바깥에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유람선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는 건 그 자체로도 볼만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을 그려낸 솜씨가 좋아서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사회의 감춰진 면을 끄집어 내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게 이 소설을 일종의 사회 소설로 느끼게도 만든다.

그렇게 담아낸 일면들은 모두, 뒷 이야기가 의례 그렇듯, 어두운 편이라서 괜한 씁쓸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왠지 모를 웃음이 배어나오는 건 저자가 그런 이야기들마저 해학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 서로 상반된 모습이 마치 비꼬는 것 처럼 보이게도 만들어서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리숙하면서도 강한 욕망이 있고 그걸 절제하지도 않는 주인공 ‘왐’은 굉장히 인간적이다. 애초에 그가 조커가 된 이유도 그런 때문인데, 그건 조커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게 일반적인 우리네와 비슷해서 더 그에게 공감도 가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가 받는 처우나 그로인한 울분이 잘 다가오기도 하고, 그렇기에 그런 그가 짤릴 것을 각오하고 저지르는 일은 일종의 쾌감을 주기도 한다.

왐을 중심으로 보면 소설은 조커로 추락했다가 점차 올라가는 일종의 성공 스토리로도 볼 수 있는데, 작가는 그것마저도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엔딩은 그의 이후가 어떠할지를 짐작케 하는 한편,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편협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그렇게 이해 못하던 자의 행동과 생각을 그토록 따라갈 줄이야. 이런 점은 묘하게 철학적인 반성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꽤 잘 쓴 소설이다. 볼 때 재미있기도 해서 실제 선원이라는 저자의 정체를 더 궁금하게 만들기도 한다.

번역은 준수한 편으로, 원작을 잘 살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식 영어 발음과 영어를 그대로 사용한 게 그 하나다. 덕분에 일부 대사는 좀 생각해봐야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겪는 의사소통 문제나 변화를 보여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영어를 쓴다고는 하지만 해석도 붙었고 쉬운 문장만 쓰기도 해서 딱히 보기 어렵지도 않고. 다만, 그래서 더 오역이 눈에 띄기도 했다. 일부는 의역이라 할 수도 있겠다만, 같은 상황을 그린 장면의 대사를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 아닌가. 좀만 더 신경쓰지 그랬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리뷰는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고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