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 코진스키(Jerzy Kosiński)’의 ‘정원사 챈스의 외출(Being There)’은 사회와 격리되어 아무것도 모르던 정원사 챈스가 사회로 나오면서 겪게되는 몇일간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표지

이 소설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의 원조라고도 불리지만1, 풍기는 분위기는 꽤 다르다. 지적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일종의 인간승리를 바탕으로 했기에 보고나면 감동을 남기는 영화와는 달리, 이 소설은 오로지 사회풍자적인 면만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의 바란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착각물’의 성격을 띈다. 누군가 챈스에게 뭔가를 묻거나 요구를 하면, 챈스는 별 생각이 없기에 짧은 대답을 하는데 놀랍게도 그걸 상대방이 제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 부터가 그렇다. 그가 사회에 나오자마자 마주친 유명인사는 그의 수려한 외모와 입은 옷, 여행가방을 보고는 틀림없이 사업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첫 인상(일종의 편견)을 가진채로 대화를 하다보니 그가 정원 이야기를 한 것도 사업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이고, 그런 그의 이야기를 착각하여 높게 평가한 유명인사의 소개를 받았다보니 일국의 대통령도 그가 그런 사람일거라 생각하며, 이게 계속 이어져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 결정 하나하나가 다 대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그렇게 일이 계속해서 커지는게 꽤나 우습게 그려져있어 그들을 비웃으며 유쾌하게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매스컴의 여론몰이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꼬집기도 한다. 같은 말을 해도 이쪽에서는 이렇게, 저쪽에서는 또 저렇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포레스트 검프와는 달리 주인공이 전혀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는 것도 눈에 띄는데, 그와는 달리 일은 점점 커져만 가서 뒤로 갈수록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떻게도 그럴듯한 결말을 지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결말은 그 전까지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조금 맥이 빠져 보이기도 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어설픈 결말보다는 훨씬 적절해 보이기도 했다. 남이 만들어낸 이미지에서 빠져나와 전처럼 정원에 서서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챈스를 그린 것은, 그런 이미지만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비꼬았던 것 만큼이나 의미있다.

그런데, 이것도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어쩌면 (챈스처럼) 작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책을 보면서 내 맘대로 원하는 의미를 덧붙이고 멋대로 해석한 것일지도 말이다.

  1. 포레스트 검프가 유명해서 이를 많이 언급하지만, 이 소설도 동명의 영화(Being There, 1979)로 만들어진 바 있다. 기회가 있으면 이쪽도 접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