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은 한국어의 존대법을 현대를 기준으로 다시 평가해보는 책이다.

표지

한국어는 존대법이 있는 언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이것 때문에 한국어 못배우겠다고 얘기해도 이해할 정도로 복잡하고 일상어에 깊숙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존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무슨 말이든 하기 전에 존대 여부를 따지는 것부터 해야한다. 사람간의 높낮이를 계산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서로간에 잘 아는 게 아닌 이상 이걸 계산한단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들도 자주 실수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큰 화로 번지기도 한다.

저자는 그러한 사례를 예로 들면서 왜 한국어 존대법이 문제인지를 차근차근 지적한다. 때로는 외국인들의 경험이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까지 존대법을 깍듯이 지키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흔치않고 민주와 평등을 기치로 하는 현대사회와도 맞지않음을 얘기한다. 보면 한국인으로서 생각해도 과하다 싶은 예들이 많아 절로 씁쓸한 표정을 짓게 된다. 특히 ‘압존법’도 그렇지만 ‘사물존대’에 이르러서는 이게 지금 뭐하자는 짓인가 싶어 벙찜을 숨길 수가 없다.

한참 문제를 지적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룬다. 실제로 존대 문제를 없애기 위해 도입했던 상호 반말이나 상호 존대, 호칭 통일 같은 것을 소개하고, 근본적으로 한국어에서 존대법을 없애면 어떻게 되는지도 살짝 살펴본다.

존대법 문제는 사실 누구나 생각해봤을만한 것이다. 다짜고짜 반말을 싸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그렇다. 그것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어려서부터 뿌리속에 박히는 것이라는 저자의 얘기는 꽤 생각해 볼 만하다. 지적하는 문제들도 대체로 공감할만하다.

그러나, 모든 내용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존댓말을 계급이나 계층 구분으로만 한정지어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외국과의 비교도 (물론 한국어의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상황에 따라 맞는 것만 가져다 붙인 느낌이 있다. 일본의 예가 그렇다. 일본어도 한국어와 비슷하게 반말과 존댓말이 명확하게 구별되어있는데다, 심지어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말이 다른 등 한국어보다 더 차별적인 요소도 남아있고, 압존법 역시 일본의 것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더 복잡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서열문화를 얘기하면서 그 반례로 일본을 드니 좀 기묘하다.

존댓말에는 상대를 존중하고 나 스스로를 조심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사실상 계급과 계층이 사라진 현대에는 이런 의미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걸 현대인들이 뜻밖에 과거로 회귀하듯 권위적이고 기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지, 존댓말을 하는 문화 자체가 부정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연히 최종적으로는 반말만이 남아야 한다는 저자의 논지에도 그리 동조하지 않는다. 반말만 남겨 그러한 문화가 사라질 수 있다면, 존댓말만 남겨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둘 중 하나만 남긴다면 반말이 더 낫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것은 반말이 훨씬 단순하고 간단하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있다. 한국어의 존댓말은 가깝게는 유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으니 그게 언어에 배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비록 조선에서 이어진 명맥을 갖고 있지만, 더 이상 유교의 나라가 아니다. 문화로서의 가치는 있으나, 실상 필요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복잡한데다 쓸데없는 오해와 분쟁을 낳기도 하는 존대법을 굳이 유지해야 하느냐는 분명 생각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