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발렌틴(Mira Valentin)’의 ‘에냐도르의 전설(Die Legende von Enyador)’은 검과 마법의 세계 에냐도르에서 펼쳐지는 모험을 그린 중세 판타지 소설이다.

표지

이세계물은 보다보면 결국 다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고 계속 보게 되는 것은, 같은 내용이라도 그걸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모 작가는 이걸 “스킨맛”이라고 표현하던데, 정말이지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싶다.

판타지 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뜬금없이 이세계물 얘기를 꺼낸 것은, 판타지 소설 역시 그와 크게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이세계물도 판타지의 한 세부 형태, 즉 기본적으로는 판타지의 틀 안에있는 장르이므로 이런 유사점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실제로 판타지물에는 ‘정석’이라고 할만한 요소나 이야기 흐름이 있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장르 특징으로 고착화된 이러한 요소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의외로 비슷한 것들도 많다.

그래서 더욱 각각이 가진 미묘한 차이 즉 “스킨맛”을 얼마나 훌륭하게 만들어냈느냐가 개별 작품의 매력을 결정짓는 최대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꽤나 우수한 편이다. 전통적인 판타지의 요소들을 거의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친숙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설정을 익혀야하는 부담도 크게 줄였는데, 그러면서도 그 친숙한 것들의 기원을 새롭게 써서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그 때문에 바뀌게 된 각 종족간의 관계나 그로부터 벌어지는 일들도 새롭고 흥미롭다. 이게 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풀어놓은 작은 장치 덕분이다.

이야기도 꽤 재미있다. 전쟁에 휘말리면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관계를 쌓고, 감춰졌던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역할에 눈떠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각 인물들이 자기 앞에 놓인 (굳이 이름붙이자면) ‘운명’을 어떻게 해쳐나갈지(또는 저항할지)도 기대된다.

다만, 이야기 진행을 위해 다소 어설픈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등장시켜 억지로 끌고가는 면이 있는 것은 아쉽다 당장 이 세계의 기원부터가 그런식이어서 큰 의문을 남기고 시작한다. 중요한 사건도 대부분 그러한 인물에 의해서 이뤄지거나, 다소 작위적인 우연에 기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그 과정을 해쳐나가는 주인공들의 매력이나 성장을 느끼기는 어렵다. 이게 뒤에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좀 갑작스럽게 보이게도 한다. 갓 성년이 된 이들로 꾸려놓은 주인공 구성만 보면 꽤 YA소설같은 면도 있다만, YA소설의 장점까지는 갖고있지 못하다.

인물관계도 각자가 자신만의 서사를 펼치다가 불가피한 이유로 얽히게 된다기보다는 다소 짜여진 각본 위에서 노는 것처럼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게 각 인물의 사연에 공감하거나 그들의 행동에 개연성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로맨스가 그러해서, 당최 이들이 무엇때문에 각자에게 끌리고 그렇게까지 격정에 사로잡히는지 알 수가 없다. 로맨스 자체는 이야기 흐름상 괜찮은 사용이긴 했으나, 단지 독자 서비스용이거나 전개를 위해 갖다 붙였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번역도 아쉽다. 특히 대사 번역이 그러해서 도통 일관된 캐릭터가 잡히지 않을 뿐더러, 때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주인공들의 매력이 덜하다고 했던 것에는, 이것도 한몫한다.

그래도 종합적으로 따지면 나름 매력있는 소설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이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의 향방도 좀 더 보고싶다.

그러다보면 앞서 얘기했던 아쉬움 중 일부는 어쩌면 덮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꽤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리즈가 막 시간된 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쉬움을 날려버릴만큼 만족스러운 이야기로 마무리될지, 아니면 끝내 아쉬운 시리즈로 남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