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브닝, 펭귄’은 거시기를 펭귄에 빗대어 한 청년의 성스런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성장기다.

표지

소설은 마치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것처럼 난잡하게 시작한다. 그래서 이게 정말 ‘인터넷 썰’이 아니라 ‘소설’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시작은 가볍다.

거시기를 ‘펭귄’이라고 한 것도 처음엔 왜 하필 펭귄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이건 아마 사춘기 소년의 핑곗거리가 그런 것처럼 별 의미나 이유는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거시기에 ‘펭귄’이라는 캐릭터를 부여했기에 주인공은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이게 사춘기 소년의 4차원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뱉어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특히 ‘악수’를 한다는 것에는 정말 빵 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재치있는 표현이라니.

초반에는 이렇게 펭귄과 악수를 하며 지내는 경험담이 유쾌하게 나오기에 종종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마치 성장기처럼 이어져 나오는 주인공의 인생 이야기도 들어줄 만했다.

첫인상이 좀 이상했던 것과 달리 막상 보기 시작하니 꽤 재미있었다.

주인공을 지배하는 듯한 펭귄을 중심으로 풀어낸 이야기는 곧 주인공의 삶이기도 하고 그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펭귄만이 모든 것이었던 어린 시절처럼 계속해서 유쾌한 이야기만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크면서 대범함과 유쾌함은 점점 사그라지며, 쳐지고 풀죽은 모습이 점점 두드러져 보이는듯했다.

펭귄과 함께하며 펭귄이 생각하던 그때는 어떻게 보면 의미 없고 변태 같지만, 하나하나가 재미고 기쁨이 되던 행복한 시기였다. 반대로, 펭귄이 생각하지 않던 시기는 고민과 걱정거리가 가득한 암울한 시기였다. 어쩌면 머리가 커지면서 생각도 많아진 때가 하필 그런 때였기에 우연히 그렇게 됐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쩌면 행복한 시기였기에 펭귄에게 생각을 맡겨둬도 괜찮았고, 그렇지 않았던 때에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펭귄은 점점 나설 자리가 없어졌던 건지도 모른다.

의사는 제구실을 못 하는 펭귄을 보고 심인성이니 곧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청년은 도통 ‘더 나은 심적 상태’를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펭귄은 계속해서 고개만 숙인 채 대답이 없다.

청년이 된 주인공은 현대 청년들의 현재를 대변하며 한숨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변태 같지만 유쾌하고 발랄했던 어린 시절이 더 좋았다고 한다면 이상할까.

중반까지는 꽤 유쾌하게 봤지만, 후반에는 묘하게 머릿속에서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었다.

다만, 작가가 분명하게 의도하거나 전달하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정확히 뭐다는 건지 (작가의 말을 읽어보아도) 잘 모르겠다. 끝도 갑자기 나버리고. 그래서 뭔가 뒷맛이 찝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