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히로시(野田 宏)’ 원작, ‘와카마츠 타카히로(若松 卓宏)’ 그림의 ‘이세계 실격 1(異世界失格 1)’은 이세계물을 재미있게 비튼 이세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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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판타지물에서 이세계물은 지나치게 흔하다. 오죽하면 또세계물이라느니 하는 식의 비하 표현까지 있을 정도다. 그만큼 피로도가 심하다는 거지.

원래라면 이세계물 자체는 딱히 그렇게 욕먹을 게 아니어야 한다. 충분히 판타지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세계물이라고 하면 일단 3류 느낌이 드는 이유는 최근 작가와 출판시장의 정신나간 표절 행태 때문이다. 기존 성공작을 그대로 배끼거나 짬뽕한 팬픽수준의 이야기를 새로운 작품이랍시고 내놓고는 변명이랍시고 한다는 얘기가 고작 클리셰라느니 하는 것이니, 그들이 뱉어낸 것들의 수준이 어떤지는 새삼 따져볼 것도 없다.

이런 게 워낙 팽배하다보니 독자 뿐 아니라 저자들도 이런 전형적인 이세계물 클리셰들을 스스로 비꼬기도 하는데, 이 만화는 그것을 주요 컨셉 중 하나로 채택한 일종의 안티-클리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을 허무에 휩쌓인, 죽음을 희망하는 자살 실패자로 설정한 것부터가 그렇다.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이세계물의 주인공 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는 이세계에서의 제2인생 역시 전혀 다른 행보를 걷는데 이게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뜬금없는 것이 많아서 ‘거기서 그러냐’는 식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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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염세적이고 죽음을 소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행동과 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코믹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행동들은 일종의 시위같은 것으로 보일 뿐 진지하게 파멸을 추구하는 것으로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캐릭터가 개성있고 서로 캐미를 잘 일으키기 때문이다. 선생을 단지 설정만 번드르르 할 뿐 실제로는 흔해빠진 주인공과 다를바 없게 만든 게 아니라, 나름 일관성있고 개성이 분명하게 만들어두고, 그런 그의 성격에 휘둘리거나 충돌하는 캐릭터를 추가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하거나 딴죽을 걸며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이러한 기본 성향은 사건이 벌어졌을때도 크게 변모하지 않아서 이야기 진행 역시 나름 개연성있어 보이게 한다.

이세계물에 대한 안티-클리셰 작품인데도 그러한 점에만 집착하지 않고 왕도적인 이야기 흐름을 사용한 것도 좋다. 클리셰와 안티-클리셰를 적절히 섞고 부딛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준다.

작화 수준도 좋고, 이야기와도 잘 어울린다. 만화인만큼 캐릭터는 단순화를 많이 했지만 배경 등은 세밀하게 그린 것도 많아서 꽤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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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이세계 실격’이고 선생도 대놓고 ‘다자이 오사무’인데다 본문에서도 그의 작품을 언급하기는 하는 등 이 만화는 일종의 ‘인간 실격’ 패러디 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딱히 감흥이 없거나 무슨 말인가 싶은 대사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딱히 그러한 패러디가 주요한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이일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주석으로 왜 그런 대사가 나오는 것인지 정도는 좀 언급해줬으면 좋았으련만, 편집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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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상태도 그리 좋지 않다. 이 만화는 여백없이 큰 그림을 사용한 컷도 있는데, 그런 것 중에 바깥이 잘려나간 것도 여럿 눈에 띈다. 전자책을 내거들랑, 그건 짤리는 것 없이 잘 내줄려나.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고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