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에 이은 안전가옥의 두 번째 앤솔로지인 ‘대멸종’은 대멸종을 주제로 진행했던 2018년 겨울 공모전의 수상작 다섯 편을 담은 단편 소설집이다.

표지

‘대멸종(Mass Extinction)’이란 거시적인 생물군의 다양성과 개체 수에 있어서 급속한 감소가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공룡의 종류가 바뀌거나 지상에서 사라진 것을 꼽은 ‘5대 절멸 사건(5 mass extinction)’이 유명하며, 이제까지의 생물 역사를 보면 인간도 언제가는 이러한 대멸종의 시기를 맞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그러한 ‘인간에게 닥치는 대멸종’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같은 주제를 그리면서도 모두 제각각의 매력과 재미를 담고있어 하나씩 보는 맛이 꽤 쏠쏠하다.

‘시아란’의 ‘저승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은 독특하게도 사후세계를 통해 세상의 종말을 그렸다. 인간 위에 있는 것 같지만 인간으로 인해 돌아가는 사후세계가 인간세계의 종말을 맞게 되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를 보는 건 꽤 흥미롭다. 다양한 저승이 있는 사후세계를 그려서인지 그것들을 아우르는 통일된 사상 같은것도 있어서 꽤 괜찮은 판타지의 맛도 보여주면서, 그들이 인간을 통해 마지막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들을 통해 SF의 맛도 슬쩍 보여준다. 이야기는 조금 열린결말처럼 끝나는데, 과연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됐을지 사뭇 궁금하게 만든다.

‘심너울’의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는 나름 현실감 쩌는 직장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매트릭스를 연상케 하는 사이버 펑크로 가는 이야기다. 간단한 것도 제대로 볼 줄 몰라 신입에게 설명을 듣는 업계 선배라던가, value overflow와 buffer overflow를 헷갈린 듯한 프로그래밍 얘기 등은 쫌 황당하기도 했지만, ‘버그’와 ‘자원 한계’라는 것을 현실과 엮어 나름 재미있게 풀어냈다.

‘범유진’의 ‘선택의 아이’는 보통 SF를 떠올리는 대멸종에선 드물게 신화적인 이야기다. 신이라는게 기본적으로 인간의 특정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보니 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인간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심,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오는 화(대멸종) 등을 익숙하고 유명한 홍수 신화와 엮어 나름 개연성있게 잘 그려냈다.

‘해도연’의 ‘우주탐사선 베르티아’는 어떻게 보면 가장 전형적인 SF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 과학적인 내용이 반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주의 중심에 관한 이야기나 뉴럴 네트워크 이야기도 꽤 흥미로웠다. 다만, 미지의 우주를 얘기하다보니 우연에 기댄 얘기가 너무 많았던 건 조금 아쉽다.

‘강유리’의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 줘’는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대멸종 이야기다. ‘선택의 아이’와 함께 전혀 과학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는 이야기 중 하나였는데, 중세 이전, 고대의 우주관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세계에서 의도찮게 찾아오게 된 멸망과 그를 대하는 인간들을 나름 잘 그렸다.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화를 부른다는 점은 물론 이야기의 끝이 묘하게 씁쓸함을 남긴다는 점 역시 신화적인 이야기였던 ‘선택의 아이’와 닮은 점이 많다. 전혀 다른 두개의 이야기가 이런 유사점을 보이는 것이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다.

이 소설집은 주제가 취향에 맞았서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기대만큼은 만족스러웠다. 다만, 그건 단편 각각의 완성도나 재미가 좋아서 그렇다기 보다는, 이렇게 앤솔로지로 한데 묶였기 때문에 그런 것에 더 가깝다. 각각을 따로 놓고 보면 아쉬운 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주제로 통일된 작품 5개를, 그것도 서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다룬 것을 엮었기에 각각에서 느낄 수 있는 아쉬움이 앤솔로지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덜 느껴지는 편이다. 서로 연관은 없지만 의외로 서로 보완해준달까. 그래서 반대로 여기엔 실리지 못한 나머지 2편의 단편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덮고나서 만족감이 있는 꽤 잘 만든 소설집이다. 그게 다음 앤솔로지도 기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