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는 그래비티북스에서 내놓는 SF 시리즈 ‘그래비피 픽션’의 아홉번째 작품이다.

표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는 정체성에 대해 묻는 유명한 철학 문제다. 짧게 요약하자면 “배의 모든 부분을 교체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하는 거다.

이 정체성 문제는 단순히 특정 사물에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로까지 넓혀 생각할 수도 있는데, 거기엔 인간 역시 포함된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의 테세우스의 배 문제는 현재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가 아파서 떼우거나 임플란트로 교체하는 게 그 흔한 예다. 장기이식이나 인공장기, 성형도 그런 일종이고, 더 나아가 그런 인위적인 행위가 없더라도 짧게는 몇일, 길게는 십수년 단위로 끊임없이 세포 교체도 일어나고 있다. 완벽하게 동일성을 유지하는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체를 모두 바꾸거나 그 변화가 급작스럽지는 않기에 아직까지는 어떤 부위나 방식의 교체가 있더라도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경우는 없다. 그건 한 인간을 다름아닌 바로 그라고 하게 하는 자아, 즉 기억와 감정, 그리고 지성 등을 담고있는 뇌를 현재로서는 대체할만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그게 가능한 기술수준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생체를 잃어버린 나는 여전히 나일까. 나와 같은 기억과 지성을 갖고있다면, 그것은 나와 완벽히 동일한 개체인 걸까. 나라 할만한 존재가 여럿이 생긴다면, 과연 원래의 나라 할만한 존재는 누구일까.

‘인체의 교체’라는 가정과 기술적인 요소 때문에 테세우스의 배 문제는 자연히 SF에서 애용되는 소재였다. 여러 작품들에서 핵심 주제로 또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심층적인 주제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를 통해 인간의 미래상을 그려보거나 인간의 정체성(Identity)과 인간성(Humanity)에 대해 풀어내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그런 작품들의 후계자인 셈이다.

그런만큼 기존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꽤 많다. 소설에서 풀어내는 철학적인 이야기들은 물론 SF적인 상상력도 그렇다. 애초에 그걸 피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보니 일부는 일부러 대놓고 인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조금 아쉬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소설의 완성도는 꽤 좋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얘기할 때 나오는 여러 정체성에 대한 이론들도 잘 담았고, 그것을 단순히 구겨넣어 담은게 아니라 소설에 잘 어울리게도 했으며, 총 셋으로 나눠 진행하는 이야기도 꽤 짜임새가 있다. 거기에 이야기를 액션물로 만들어 재미까지 더했다. 그래서 소설이 담고있는 깊고 무거운 주제에 비해 이야기 자체는 훨씬 부담없고 가볍게 즐길 수가 있다.

이야기의 마무리도 꽤 적당하다. 물론 긴장감이 부족해 뒷심이 좀 아쉬운 감도 있긴 하지만, 오히려 무리해서 엇나가거나 펼쳐논 것을 제대로 그러모으지도 못한 채 끝나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어느 정도는 상상할 여지도 남겨두어 읽고 나서는 기분좋은 여운에 빠질 수도 있다.

이 리뷰는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고 작성했다.